서울대교구 사목국 성경통독 - 신약2. 마르코
- 강사: 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 서울대교구 사목국에서 진행하는 성경통독
- 사목국에서 발간한 "성경통독지도"와 함께 시청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https://youtu.be/VrN2GIcSV4g?si=Dj-H1UNp_6egZ9Nj
Transcript
안녕하세요? 시작기도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십니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신약 성경은 복음서가 형성되기 전에,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기쁜 소식 즉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 그분의 삶을 통한 가르침이 우리들에게 복음으로 전해졌고 그리고 그러한 복음은 사도 교회,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구전을 통해, 기록을 통해서 전해져 왔습니다. 전례 안에서, 교리를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선교의 차원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이 전해지던 것을 하나의 책으로 문서로 묶게 되는 과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직접 함께 살았던 목격 증인들이 순교를 하거나 자연사를 통해서 선종하심으로 인해 가지고 구전의 증언이 사라져가는 어려움을 맞게 되고 또 선교를 하다 보니까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필요하게 됐고 이러한 목적으로 책으로 엮어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것이 교회 안에 내려오다가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 때 우리 가톨릭 교회는 73권의 거룩한 책 곧 성경을 선포하게 되어서 우리가 오늘날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성령은 우리와 함께 어떻게 생활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지요.
이러한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칼 야스퍼스'라고 하는 철학자는 "나는 왔누나, 온 곳을 모르면서 나는 있누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가누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죽으리라,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라고 하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바로 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이러한 답을 우리는 마르코 복음 안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요. 특히 마르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책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마르코 복음 8장 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여기에 우리는 어떤 답을 드릴 수 있을까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제 그 답을 함께 마르코 복음을 통해서 찾아가 보도록 합시다.
마르코 복음 안에서는 특히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구체적으로 세 군데에서 표현되어지는데 우선 마르코 복음 8장 30절, 바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하는 장면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 안에서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는 고백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1장 1절에, 마르코 복음 시작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마르코 복음서 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진리를 마르코 복음 사가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는 유다 전통 안에서 메시아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러나 복음서 안에서 즉 초기 교회 공동체는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서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우리는 살펴볼 수가 있겠고요. 또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메시아에 대한 신앙고백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고 이제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메시아에 대한 증언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나는, 우리 공동체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마르코 복음의 여정이라고 여겨집니다. 우선 마르코 복음은 70년에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가장 간결한, 16장으로 된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역사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보다는 행적을 중심으로 전해주는 복음서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행적의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가다, 떠나다, 출발하다' 라는 동사를 많이 사용하고요. 또 행동의 즉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곧장, 즉시' 이러한 부사들 또한 많이 사용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마르코 복음서는 간결함에 있어서 또 핵심적인 예수님의 삶에 대해 전한다는 측면에서초대 교회 때부터 신앙 교리 입문서로 그렇게 이해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예비 신자를 위한 교리서, 예비신자를 위한 복음서로 일컬어져 왔지요. 굉장히 간결한 복음서이다 보니까 루카 복음과는 달리, 또 마태오 복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 소식이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70년 8월 29일에 일어났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유다라고 하는 하나의 민족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 모든 사람, 모든 민족, 모든 백성에게 구원이 열렸다고 하는 구원의 보편적 사상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마르코 복음의 내용입니다. 사도 시기 초기에는 사실 저자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용 자체, 즉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나 2세기 이후부터 누가 이 예수님의 삶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는가 하는 저자를 규명하는 작업이 시작이 되었고요. 그래서 특히 여러 내려오는 복음서들 중에서 참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회가 전해주는 복음서가 어떤 건지 구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는 이렇게 증언을 합니다. 베드로의 통역관이었던 마르코가 베드로의 증언을 기반으로 집필하였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받아들여서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마르코다 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문적인 성서신학이 발달되면서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또 유다인들의 관습을 잘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르코 복음은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쓰여졌다 라고 하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사용할 경우에 그리스어로 번역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5장 41절에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그리스어로 번역해 준다는 거지요. 마르코 복음 7장 34절에서는 '에파타' "열려라"라는 뜻이다. 또 마르코 복음 15장 34절에서는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이렇게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된 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측면 또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한 유다인들의 관습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마르코 복음 7장 3절에서 4절 또 마르코 복음 14장 12절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그 독자들은 이방계일 것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방인들을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이나 또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의 장면에서 우리는 이것을 찾아볼 수가 있지요.
이러한 마르코 복음의 신학적 주제는 첫 번째, 십자가 신학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강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수난기가 마르코 복음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1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우리는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바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어합니다. 이 땅에 온 역사의 예수가 바로 믿어 온 또 기다려 온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마르코는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세주 구원자이신 메시아는 히브리어라면 그리스도는 그리스어 그래서 '메시아' '그리스도' 동일한 뜻을 지닌 단어를 볼 때도 마르코 복음이 무엇을 우리에게 증언하고자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을 통해, 마귀들의 증언을 통해,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대사제 앞에서 예수님 스스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 신학적으로 커다란 주제 중의 하나가 메시아 비밀 이 메시아 비밀은 하느님 나라의 비밀과도 연계되어져 있는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일정한 시기에 다다르기 전에는 당신이 메시아임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즉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신앙을 고백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그 고백 이후부터 당신이 누구신지 또 당신은 어떠한 삶을 걸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메시아 비밀을 통해서 당신을 서서히 점진적으로 알려주신 예수님은바로 그 메시아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와 있음을 또한 알려주셨고 바로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이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러한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께 응답한 사람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이겠지요. 예수님이 당신의 정체성을 알려주시는 만큼 일정한 시점이 되기 전에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귀들에게, 치유된 이들에게, 제자들에게 아홉 번의 함구령을 내리시고 계시고요. 이러한 이유는 유다인들이 생각했던 현세적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은 지향을 갖고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인자'라고 하는 칭호를 주로 사용하셨고요.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서서히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요. 이러한 부분들을 제자들의 몰이해 라고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예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은 정말 이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시구나 라는 올바른 이해와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 스스로가 당신에 대해서 서서히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려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또 그리고 자신들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예수님에 대해서 배척하고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척과 거부라고 하는 걸림돌을 넘어서서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 부활을 통해서 모든 이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당신의 사명을 완성해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10,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성찬례를 제정하면서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14,24)라는 말씀을 통해서모든 이를 위한 구원자, 구세주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점진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통해서 제자들은, 또 예수님을 둘러싼 당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 안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끊임없이 이해될 수 있는 그러한 신호를 받았지요. 그러나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제 참된 제자로서의 사명을 지속적으로 실행해 가야 한다는 것이 마르코 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6장 15절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복음, 기쁜 소식,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그분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 행적을 널리 선포하고 그것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도 바로 그러한 삶으로 초대되어질 수 있도록 응답할 수 있도록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마르코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요.
크게 마르코 복음은 장소와 내용에 따라서 전반부와 상경기, 후반부로 나누어집니다. 1장 1절에서 8장 30절까지를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라고 한다면 8장 31절부터 10장까지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11장에서 16장까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장 1절에서 8장 30절까지 전반부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인데요. 이 갈릴래아 활동기는 다시 1장 1절부터 4장 34절까지는 유다인들의 지역, 즉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서 이루어지는 내용들이 주로 담겨져 있고요. 4장 35절부터 8장 30절까지는 이방인들의 지역, 즉 갈릴래아 호수 동쪽에서 주로 예수님이 어떠한 말씀과 행적을 보여주셨는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성경을 읽어 보면 아시게 될 텐데 세례자 요한의 출현, 예수님의 세례와 유혹, 구마와 치유 기적,또 유다인들과의 논쟁, 씨 뿌리는 사람, 등불, 겨자씨의 비유, 열두 제자의 선발과 파견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으로 마무리되어집니다. 이 전반부에서 마르코 복음서가 갖는 주된 관심사는 제자들을 모으고 가르침으로 해서 교회를 이루는 것이고요 그리고 전반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정체성이 조금씩 조금씩 전해지고 인식되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8장 27절에서 30절에서 바로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이제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시게 되는 계기를 어떤 전환점을 맞게 되는 것으로 전반부는 마무리가 되지요. 이 전반부 안에서는 유다인 전통과 충돌하는 모습을 또한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율법의 준수 여부를 두고서 유다인들과 예수님이 서로의 가치관에 있어서 차이를 보여줍니다. 또한 이러한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8장 31절부터 10장의 내용은 상경기입니다 즉 갈릴래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 여정 가운데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에 걸친 예고 그리고 그 예고를 통해서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교육의 과정을 우리는 만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지만 제자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8,34)는 그 말씀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본인이 바로 그러한 길을 지금 걷고 있고 그 길을 완성할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이 여정을 걸어가시면서 섬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시는데요. 10장 45절에서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을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완성하시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제자로서의 신원을 잘 지켜가야 한다 즉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충실히 제자들인 우리들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후반부 11장부터 16장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의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이것을 우리는 전례 안에서 성주간 예절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11장에서 13장까지는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의 내용을 알려 주고 있고요. 14장부터 15장은 최후 만찬, 예수님의 체포와 신문, 사형 선고, 죽음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최고 의회 앞에 즉 대사제 앞에서 예수님이 이러한 질문을 받지요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14,61) 거기에 예수님은 "그렇다"(14,62)라고 당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인물이라는 단정을 불러일으키게 되지요. 또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빌라도 역시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15,2)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15,3)라고 말씀하시면서 정치적인 임금이 아니라 바로 영적인,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임금임을 밝히시는데 그러나 빌라도는 당시의 정치적인, 군사적인 배경 아래에서 예수님을 반로마적인 인물, 황제를 거부하는 인물로 단정짓게 됩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모독하는 인물 또 반로마적인 인물로 단정된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물고 가는 한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시고 그 다음에 16장 1절부터 13절까지는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줍니다. 즉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그리고 그분이 발현했다 즉 부활하셔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16장 14절부터 20절은 예수님께서 세상 곳곳에 가서 모든 이들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시면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는 것을 전해 주면서 마르코 복음은 마무리가 됩니다.
이 후반부에서 마르코 복음의 주된 관심사는 십자가 사건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합니다. 즉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종말론적으로 선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어느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때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이 지금부터 끊임없이 그 나라를 향해서, 그 완성을 향해서 충실히 제자들인 우리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라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이 후반부는 유다인들의 전통과의 충돌이 특히 성전을 배경으로 나타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 성전을 정화하는 모습, 또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는 모습 또 성전 파괴를 두고 하는 여러 유다인들의 거짓된 증언을 통해서 바로 성전을 둘러싼 예수님의 정체성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음을 보여줍니다. 마르코 복음 1장 1절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이 마르코 복음 전체 아니 우리 신앙의 전체를 담는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의 선언이자 마르코 복음을 쓴 목적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즉 신앙을 고백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십니다"라는 우리의 신앙 고백을 전해주고 있고 이것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영원히 지속되어져야 합니다 라는 것을 바로 1장 1절부터 마르코 복음은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창조주 하느님이시고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주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라는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또한 이러한 구원 사업에의 협력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바로 이 땅에 오신 우리와 똑같은, 죄 빼고는 똑같으신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 11절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세례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 알려주고 계시고 또 마르코 복음 9장 7절에서는"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거룩한 변모 때 (알려주십니다) '예수'라고 하는 이 이름은 '야훼께서 구원하시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구약이나 예수님 시대에 일반적으로 흔한 이름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 뜻이 너무 좋잖아요? 그런데 바로 이 예수님, 하느님이 우리에게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아야만 하고 또 받으실 수 있는 그런 분이라는 사실을 마르코 복음은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은 바로 복음입니다.
즉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 자체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을 그리스어로는 '에우안겔리온'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에우'는 좋다, 기쁘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요 '안겔리온'은 소식을 뜻합니다. 그래서 복음, 에우안겔리온, 기쁜 소식우리가 이렇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이러한 기쁜 소식을 교회 공동체가 말로써 선포하고 그리고 그것을 모아서 글로 선포하고 이제 우리가 그것을 눈으로 읽고 믿고 전하면서 또 살아가면서 고백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고 또한 예수님이 전한 내용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복음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느님으로 계시된 예수님을 나는, 우리는 믿는가? 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따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느님을 체험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또 믿지 않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증언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는 그러한 신앙생활의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마르코 복음은 또 마르코 복음 1장 1절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르코 복음 짧습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신앙의 고백서입니다. 1장부터 16장까지 천천히 읽으시면서 정말 예수님이 나를 위한 분이심을 다시 한번 깨닫는 그런 여정을 걸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십니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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